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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존재하는 것만 남긴다. 그러나 기록이 남긴 그 '존재'는 항상 완전한 정보가 아니다. 특히 역사 문서를 다루는 디플로마틱스(diplomatics) 분야에서는 ‘무엇이 남았는가’보다 ‘무엇이 빠졌는가’를 읽어내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문서에서 특정 구성 요소가 빠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편집 실수가 아닌, 정치적 맥락이나 문화적 배경, 행정적 절차에 의한 결과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디플로마틱스의 해석 범위 내에서 ‘구성 요소 누락’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본다. 이를 통해 문서의 침묵 속에 숨겨진 정보를 어떻게 발굴해 낼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디플로마틱스 관점에서 문서 유형에 따른 누락의 해석 가능성
디플로마틱스 관점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해당 문서의 유형이다. 공식적인 왕실 문서, 사법 문건, 교회 관련 문서, 사적 계약서 등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요소가 필수적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다르다. 예를 들어 중세의 왕실 칙령문에서는 인장, 서명, 인호문 등이 핵심 구성 요소인데, 만약 이 중 하나가 누락됐다면 그것은 문서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개인 간 거래에서 서명이 빠졌을 경우에는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고, 당시 관행에 따른 생략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해석자는 문서의 ‘장르’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에 따라 누락이 갖는 함의를 조심스럽게 분석해야 한다.
누락이 의도된 행위일 가능성
모든 누락이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니다. 디플로마틱스에서는 특정 정보의 누락이 문서 작성자의 의도적인 선택일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예컨대 권력관계에서 하위 주체가 상위 주체에게 복종을 선언하는 문서에서, 반대급부에 해당하는 조건들이 기록되지 않은 채 복종만 강조되었다면, 이는 정치적 계산이 개입된 편집 결과일 수 있다. 또한 종교 문서에서는 특정 교리나 교황의 권위를 암묵적으로 생략함으로써 해당 교구의 자율성을 암시하려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처럼 누락은 ‘말하지 않음’이라는 형태로 상징적 권력 구조를 드러내기도 한다.
외부 문맥과 비교를 통한 누락의 재구성
구성 요소 누락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부 문헌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디플로마틱스 연구자는 동일한 형식의 다른 문서들과 비교함으로써 ‘정상적인 구성’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판단하고, 특정 문서에서만 발견되는 누락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12세기 영국 왕실 문서에서 인호문이 사라진 시기를 추적하면, 왕실 행정의 변화와 기록 방식의 간소화 과정이 드러날 수 있다. 이처럼 누락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당시 제도와 행정 시스템의 변화를 반영하는 사료가 될 수 있다. 문맥 비교는 누락의 ‘의미화’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며, 해석의 신뢰도를 높이는 핵심 절차이다.
필사 및 보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의도적 누락
일부 구성 요소의 누락은 문서 작성 당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이후의 필사와 보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디플로마틱스가 단순히 텍스트의 의미만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가 존재하게 된 물리적·문화적 과정 전체를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중세 및 근세 초기에 제작된 문서들은 원본이 소실되고 후대의 사본만이 전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용의 정확성과 구조의 완결성은 필사자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던 지역의 필사자가 라틴어 공식문서를 베껴 쓸 때,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문법적 요소나 고유 명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발견되곤 한다. 또한 공동 필사 환경에서 여러 명이 문서를 나눠 필사할 경우, 중복 방지 혹은 과잉 정리를 위해 특정 문장들이 생략되거나 요약되는 사례도 있다. 이처럼 누락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문서 처리 방식 자체에 내재된 체계적 한계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보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손상 역시 중요한 누락 원인이다. 종이와 양피지 등 문서 재료는 수분, 곰팡이, 해충, 온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의도하지 않은 훼손으로 인해 일부 텍스트가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한 문서가 여러 번 접혔거나 말려 있었던 흔적이 있다면, 접힌 자리에 있던 문장이나 서명, 인장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디플로마틱스 연구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단순 보존 상태로만 판단하지 않고, 문서 해석의 주요 변수로 간주하며, 이를 통해 당시 문서의 실제 활용 방식이나 보관 체계를 추론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서의 재활용도 누락을 발생시키는 흥미로운 사례다. 잉크를 지우고 다시 쓴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문서는 위에 덧씌워진 글로 인해 원래의 구성 요소가 가려지거나 유실된 경우가 많다. 디플로마틱스는 잉크의 성분 차이, 문자의 중첩, 필기 도구의 흔적 등을 통해 다층적인 문서의 층위를 분석하며, 이 과정에서 단순히 "무엇이 쓰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워졌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다룬다. 이처럼 필사와 보존의 물리적 조건은 누락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며, 문서의 진본성 평가와도 직접 연결된다.
침묵이 말하는 것: 누락을 통한 권력과 정체성 분석
누락된 기록은 때때로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디플로마틱스는 문서에 담긴 정보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혹은 구조적으로 삭제되거나 생략된 정보가 지닌 함의를 주목하며, 특히 권력 구조가 명확한 시기일수록 침묵의 해석 가능성은 더 커진다. 문서가 지배자의 시선으로 작성된다는 기본 전제를 고려할 때, 피지배자 또는 주변부 집단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권력의 비대칭성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한 언급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언어화할 수 없도록 만드는 시스템적 침묵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 행정 문서에서 원주민의 명칭이나 참여자 리스트가 생략된 경우, 이는 단순한 편의성의 결과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식민 행정 시스템이 해당 집단을 ‘통계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하려는 구조적 전략일 수도 있다. 이처럼 누락은 행정 효율이나 문서 제작 관행의 산물로만 보기에는, 그 자체가 이미 배제의 논리와 깊게 결합돼 있을 수 있다. 디플로마틱스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문서 외부의 권력 관계와 언표 조건을 동시에 해석의 범위로 확장시킨다.
더 나아가, 침묵은 단지 소외된 타자 집단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문서를 생산한 주체가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이나 입장을 의도적으로 감추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예컨대, 공동 명의로 작성된 종교 개혁 문건에서 작성자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면, 그것은 당시의 검열이나 보복에 대한 방어적 조치일 수도 있고, 특정 집단의 ‘익명성’을 통해 전체 목소리를 강조하려는 상징적 전략일 수도 있다. 디플로마틱스는 이처럼 기록되지 않은 주체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문서의 표면 너머에 숨어 있는 담론 권력의 구조를 추적해 나간다.
또한 누락은 기술적 제약에 의한 침묵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정 시대에는 인쇄 또는 필사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문서 분량이 제한되었고, 이로 인해 특정 정보가 생략되는 일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어떤 정보를 우선순위에서 배제했는가를 통해, 당시 사회가 중요하게 여긴 가치 기준과 지식의 위계를 유추할 수 있다. 즉, 무엇을 ‘기록하지 않기로 결정했는가’는, 무엇을 ‘기록했는가’만큼이나 해당 사회의 문화적 구조를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이처럼 디플로마틱스는 단지 문서의 ‘존재’를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재구성하는 해석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누락은 분석의 출발점이다
구성 요소의 누락은 정보의 결핍이 아니라, 해석의 출발점이다. 디플로마틱스는 이러한 누락을 단지 오류나 실수로 보지 않고, 의도·맥락·형식·보존 상태 등 복합적 요인 속에서 의미화한다. 구성 요소가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당시의 제도, 권력, 문화, 정치 상황을 역추적할 수 있다. 특히 동일한 형식의 문서들과 비교하거나, 필사 과정의 오류 가능성을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누락의 해석은 더욱 정교해진다. 디플로마틱스가 단순한 문서 분석을 넘어 사료와 권력의 관계를 파헤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없음’을 읽어내는 기술 덕분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역사 문서 연구에서는 ‘기록된 것’만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것’에도 주목해야 하며, 이는 누락의 해석을 통해 더욱 풍부한 역사적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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